책 [저스트 키딩]
주위에 아이같이 천진난만하고 순수함을 내뿜는 사람이 나에겐 없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얼굴 표정으로 정상 필터로 걸린 말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부정적이지 않게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상대 기분도 맞추고 자기 생각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전달할까.'를 골똘히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을 몇 번 보게 될 때마다, '동화 같은 사람들'이라고 나는 나만의 단어로 분류한다. 사람에게 동화 같다는 말, 어린아이 같다는 말은 '어른 답지 못해,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느꼈는데 실제 순수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는 책을 만나게 되니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동화란 아름다운 순수하고 맑은 물처럼 투명해서 그걸 통해 비치는 내가 가진 얼룩이 잘 보여 괜스레 망가트리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 그래서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순수하고 동화처럼 투명한 사람을 보게 되면, 좀 더 가까이하고 싶어 진다. 나의 불투명한 내면이나 마음이 혹시 좀 더 투명해져 맑아질 수 있을까 싶어서.
책 [저스트 키딩]은 13개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으로 짧은 이야기라 빠른 템포로 읽혀진다. 이전에 정용준 작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을 너무 신나게 잘 읽어서 이번엔 소설로 새로 접하고 싶었다. 짧은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 안에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을 어떻게 보여줄지가 궁금했는데 이야기마다 느껴지는 속도감이 달라서 금방 완독을 할 수 있었다. 13개의 이야기들 중, 소설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와 동화로 느껴지는 이야기 이 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당나귀 노인' '세상의 모든 바다' '겨울 산'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데, 왜일까 생각하니 엄마, 형제들, 바다로 떠난 이, 기다림 등 순수하고 투명한 이들이 등장해서 이런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은 아닐까. 이외에 '브라운 펜션'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펜션이라는 소재가 특이했고, '저스트 키딩'은 음산하면서 살짝 기괴한 분위기가 독보여 작가가 약간 음산한 호러 소설을 잘 쓰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너무 아름다운 날'과 '친구들에게'는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하나로 묶이는 질문이 좋았다. '끝없는 고통으로 이어진 현실 vs 끝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꿈'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이처럼, 정용준 작가가 사람만이 겪을 수 있는 저 밑바닥의 이면을 짧지만 독특한 소재와 빠른 속도감으로 가득 채워서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거울을 보다가 잠든 사람은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꿈이 된다는 동화를 읽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노트에 메모했는데 그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울적한 나는 어느새 노인이 되었네.
이제 더는 소설이 좋다느니 소설을 계속 쓰겠다느니 같은 다짐과 결심은 하지 않을 테다. 다짐 없이도 살고 결심하지 않고도 쓰는 이 삶이 내게 읽을 것과 쓸 것을 계속 줄 것을 알고 있으니까.
_작가의 말
'마지막이 중요해. 들고만 있어야 해. 절대로 그걸로 내리치면 안 돼. 알겠니?'
소년은 주변을 서성이며 적당한 돌멩이 다섯 개를 찾았다. 가방을 열었고 돌을 집어넣었다.
_돌멩이, 26p
나는 몰랐어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나쁜 것들 찾아낸다는 것을. 아무리 좋아도 지겨워진다는 것을. 좋은 것이 싫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_너무 아름다운 날, 47p
때문에 나는 그가 왜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후회와 어리석음은 인간의 영원한 양식이니까요.
_너무 아름다운 날, 51p
"거지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 거지 같은 거야. 그러니 약속하렴. 너는 그런 것에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그런 마음 앞에 침을 뱉고 등을 돌리겠다고 말이야."
_시간 도둑, 56p
'어떤 가사를 써도 마음이 온전히 담기지 않아. 어설프게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차라리 쓰지 않음으로 내 모티프와 영감을 지키는 거야.'
그때는 왜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을까?
"개소리하지 마. 에이징? 억지로 멀쩡한 것을 망가트리면서 그것이 멋있게 낡은 거라고? 미친새끼. 부서진 것과 낡은 것은 다른 거야.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꼼수로 사려고 하잖아."
_시간 도둑, 64p
그는 실패한 가수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거나 이룬 적이 없으므로 그에게 실패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실패에 대한 로망을 갖는 것으로 실패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_시간 도둑, 64p
한국은 이래서 안 돼. 몰래카메라잖아. 저스트 키딩. 외국처럼 여유 있게 웃고 넘기면 되는데. 트라우마니, 공황이니, 정신과 치료라니, 짜증 나.
_저스트 키딩, 105p
하얗게 질려 벌벌 떠는 점원을 보고 모자는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장난이야."
_저스트 키딩, 109p
막막하고 하염없어도 눈을 미워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라. 눈과 비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지. 천국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좋은 곳에 있으니 슬퍼 말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기쁘게 나를 만나러 오렴.
_겨울 산, 156p
빛을 마실 수 있다면, 빛을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걸 두 손에 가득 담아 슬픈 셋째의 입술에 흘려 넣어주고 아픈 첫째의 허리에 더운 열기를 전하고 싶다.
_겨울 산, 165p
"그래도 내 할 일을 해야 하는데. 하려면 할 수도 있는데. 마음이 나지 않네요. 용기가 없는 건가......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겠지만 소의 힘으로 얻는 게 많도다. 잠언인데요. 주문 같은 거예요."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번거롭고 힘들어도 해야 한다는 거죠. 그것 때문에 얻는 것이 있으니까. 징징거리지 말자. 이런 뜻일 거예요."
_종이들, 183p
궁금하다. 내 문장을 어떻게 고쳤을까? 막혔던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어떻게 이었을까? 우습다. 내가 쓴 어떤 소설도 내가 겪은 것보다 이상하지 않았다. 이게 이야기였다면 나는 말이 안 된다며 이렇게 쓰지 않았겠지. 소설을 쓰기 어려운 게 바로 그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괴상한 삶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 그 어떤 끔찍한 상상을 해도 현실은 그것보다 끔찍하니까. 내 몸을 뺏은 나도 그걸 곧 느끼겠지. 느껴봐라. 흡수된 내가 피와 땀이 되어 실컷 비웃어줄 테니까.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와. 얼마 만의 해피 엔딩인가.
_해피 엔딩,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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