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주에 대하여]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말, 각자만의 지옥이 있다는 말을 스쳐 지나가는 영상에서 들었다. 어느 사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옥이 있다고, 성경에서도 각 사람마다 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다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는 그 끝이 없고 그만의 고민과 걱정이 분명 있다는 것과 아픔은 경중을 따지기 힘들다. 그래서 때때로 인생을 살면서 오는 힘듦의 순간에서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내 마음을 다스리려고 할 때, 도움이 되었다. 때론 도움이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비슷한 생각들을 지니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궁금하기도 하다. 하나의 가치관이 생겨나기까지 쌓이고 쌓인 경험담과 생각들이 많을 테니, 그것들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더불어 그것들을 책이나 영상 등 다양한 경로로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글로 말로 행동으로 표현해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는 좋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딱 집어 자신만의 글을 쓰는 작가의 책을 읽는 것도, 이를 다양한 사람들과 SNS상에서 나누는 것도 전부 말이다. 그걸 통해 각자만의 지옥이 각자만의 십자가를 보며 나 외의 다른 사람들도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위안을 삼을 수 있어서 좋다.
책 [나주에 대하여] 는 사람이 살며 느끼는 '마음'에 집중해 보여주며 그 마음을 느끼게 해 준 관계에 대해 말해주는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친구와의 관계, 이성과의 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여성임 점에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좀 더 섬세하게 느껴졌다. 또한, 20대~30대 여성이 주로 등장하기에 읽는 나도 비슷한 처지라 더욱 이때에 느끼는 감정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작가 또한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을 부분 부분으로 나눠 각 소설에 나눠 구현한 듯한 느낌이 읽으며 느껴져 이 부분이 가장 좋았다. 현실에 충분히 있을 법할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느끼게 된 마음과 감정과 생각들을 자신만 느끼는 것이 아닌 비슷한 연령과 비슷한 이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화자로 삼아 자연스럽게 글로 표현하는 김화진 작가의 표현이 내 마음에 공감 이상의 공감을 하게 만들어서 읽는 내내 신나게 공감했다. 소설집 안의 '근육의 모양'이란 소설 속에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과 자신이 해본 것을 적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주인공이 있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돌아보는 것, 하나만으로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동작이라는 걸, 조심스레 전달하는 작가의 표현이 좋아서 이 책을 추천한다.
기억에 남는 문장
하루의 끝에 이불을 덮고 누워 오늘은 어떤 이름이 붙은 미완의 행성을 떠올려볼까...... 그런 고민을 하고 누운 자리에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과거의 사람들을 곱씹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에 살까 상상하는 일이 좋았다. 여러 생을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_새 이야기, 12p
우린 달라. 규희가 나와의 관계가 익숙해질 무렵 입버릇처럼 말했어. 다르지만 좋아. 내 얼굴에 언짢아하는 기색이 엿보이면 나를 달래듯이 그렇게 덧붙였지. 그런데 있잖아. 다른 걸 좋아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언제까지일까. 규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둘인데도 혼자 같았고, '나랑 진짜 비슷했던 애'로 등장하는 너를 생각했어. 곧이었어. 규희가 죽은 날이.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됐어.
_나주에 대하여, 71p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겹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도록 하는 매력적인 겹이 아니라 쓸데없는 겹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_꿈과 요리, 95p
솔지는 서로의 밑바닥을 봐야만 진정한 사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스로의 밑바닥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인간들이나 그런 말을 한다고 여겼다. 밑바닥은 그렇게 보여주자고 마음먹는다고 보여지는 게 아니라 둑처럼 터지는 것이었다. 차오를대로 차오른 물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둑이 터지고 마는 것이라고. 그날 터뜨린 것은 뭐였을까.
_꿈과 요리, 108p
잃거나 얻은 것이 아니라 해본 것. 투병이나 입원, 혹은 수술 같은 단순한 단어로 '해본 것' 리스트에 적어둘 것이었다. 해본 것은 더한다. 그것은 제인이 세운 단순한 원칙이었다.
_근육의 모양, 121p
이 모든 게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을까, 그저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마음을 놓아버릴 수가 없을까.
_근육의 모양, 139p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재인은 속으로 '해본 것' 리스트에서 유독 도드라진 단어들을 읊었다. 독립, 절교, 파혼, 끊어진 관계들의 기록을. 그리고 생각했다. 그 리스트는 흉터가 아니라 근육이야. 누가 날 해쳐서 남은 흔적이 아니라 내가 사용해서 남은 흔적이야. 어딘가에 아직 찾이 못한 근육이 있을 것이었다. 재인은 이제 겨드랑이 뒤쪽에 있는 그 근육의 이름을 알았다.
_근육의 모양, 150p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서, 가끔 너무 무섭지 않니? 그것은 어느 날엔가 희재가 했던 말이었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
_척출기, 170p
자기 슬픔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갈게요. 수술대 위에 누워 영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나를 지켰어. 최선을 다해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도 믿었다. 너라는 총체적인 세계보다 내 오른 귀의 편협한 청력의 세계가 중요해. 아픈 게 지나가고, 그 아픔의 무늬를 지닌 사람이 되었을 때 다른 아픔의 무늬를 알아보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아픔의 한복판에서 발을 구르는 채로 다른 사람 곁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_척출기, 181p
스물여섯 살의 4월 이후 대부분 돈이 숨을 쉬게 해주었지만 여전히, 삶에서 그게 전부는 아니므로 가끔 숨막히게 외로운 순간이 있다. 가장 못 견디는 때는 희미해지는 것 같을 때다. 내가 누구인지, 누굴 사랑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딱히 주변의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_쉬운 마음, 220p
그저 수영이 그렇게 사라지는 바람에, 영영 그 자리를 비운 채로 사라지는 바람에 멋대로 그 빈자리에 없던 마음을 메운 걸지도. 가장 흉내내기 쉬운 마음, 사랑으로 말이다.
_쉬운 마음, 228p
선배, 저는요...... 사실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게 좋아요. 이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촌스럽고 의존적이고 속이 빈 것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가끔 이렇게 털어놓고 싶어져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저를 좋아하는 일이, 몹시 중요해요. 한없이 그쪽으로 몰두하면 좋지 않을 걸 알아서 계속 경계하고 그 외의 것들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도...... 제가 하는 그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끈질기게 그 생각이 들러붙어 있어요. 본령처럼요.
_쉬운 마음, 240p
약을 먹지 않는 남은 하나의 척도가 재밌었다. 거짓말의 척도라니. 선생님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남이 보기에 단번에 알아채는 거짓말, 남을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을 하는 능력이 둘 다 최저라고 했다.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거의 없다고. 나는 내가 많이 감추고 숨기고 과장하고 거짓말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직해서 내게 거짓말 같은 걸 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런데 누군가 나를 속일 수도 있구나. 나에게 하는 말들이 거짓말일 수도 있구나. 그런 것을 거기에서 확인받자 왠지 좀 안심되는 느낌이었다.
_침묵의 사자, 261p
지은은 ㅎㅎㅎ 하고 웃었다. 지은의 낮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웃음소리와 다르게 지은은 언제나 호방했다. 웃음 다음에 오는 말도 역시나.
- 속상해하지 마. 원래 있는 거야, 그런 사람들
그리고 덧붙였다.
- 등 쓸어줘야 하는데. 누구 없어? 등 쓸어달라고 해. 힘들 때 누가 등 좀 쓰다음어주면 좋아.
_침묵의 사자, 285p
못생긴 마음들을 쓸 때 나는 이상하게 행복하다. 그것을 솔직하게 쓸 수 있어서, 회피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대체로 확신과 용기가 없는 채로 살아가는데, 소설을 쓸 때만은 용이가 생긴다. 이런 마음을 써도 돼. 확신도 생긴다. 이렇게 쓸 거야. 소설은 나에게 그런 것을 준다. 지레 포기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의 무른 질감이 싫었는데, 소설을 쓸 때의 나는 그보다는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다. 나는 소설이 나에게 가져다준 이 단단함을 사랑한다.
_작가의 말,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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