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너를 닮은 사람> by 정소현 소설집,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드라마로 나오기 직전,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약속 시간 전까지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잠깐 읽게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야기가 끝날까 궁금하면서도 풀어가는 과정이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읽었다.
잠깐 읽고 가야 했지만 계속 내 머릿속에 이 책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드라마가 다 끝나고 한참 뒤 문득 생각이 나서 책을 빌렸다. 처음 읽었던 그때처럼 한편, 한편에 빠져 들어가듯 읽게 된 것 같다. 이 책을 끝마치면서 스쳐 들었던 생각들, 느낀 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완독을 하고 난 뒤, 여러 편의 단편 소설이 하나 묶인 이유를 알게 된다. 완벽한 가족이라는 게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완벽해 보일 순 있어도 그 내면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지 못한다. 때론, 비극적인 일도 가족이 해체되고 가족이 가족 같지 않는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가족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지금 이때에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양장 제본서 전기
합법적으로 정부가 인정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사라지게 된다면 당신은 선택하겠습니까? 출생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이후의 삶은 내 선택으로 이루어져 이어진다. 미래를 예언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가끔은 선택한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엄마의 인생도 아빠의 인생도 그 사이 자식인 '나'의 인생도 그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누구를 탓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이것이 그냥 내 팔자인가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으로 그녀는 이 같은 결정을 한 것 같았다. 현재 자신의 모습, 환경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과거로부터 축적된 날들의 결과라는 걸 알기에 사라지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봤던 그녀가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단순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이전의 봤던 동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된 것 같다. BBC 유튜브 채널에 일본에도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영상을 보았다. 분명 함께 살며 함께 일하며 지냈던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증발하듯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이유를 파헤치면서 각자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였다. 중개인을 통해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고 존재한다는 모든 것을 없애고 살아가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선택할 순 없는 문제인 거 같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선택하는 과정이 힘들고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히고 사라지게 된다면 사람으로서 존재감이 희미해져 스스로 살아있다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때론 어느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본다. 특히 내가 한 일이 참을 수 없이 창피하거나 너무나 힘든 일들을 겹칠 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현재가 있다면 과거도 있듯 과거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를 지울 수 없다면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이후 지우고 싶지 않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 사실 말은 쉽지만 행동하긴 쉽지 않다 생각한다. 그래도 오늘이 지나가면 내일의 아침이 내게 다가오기에 지우고 싶지 않은 그런 미래를 만들어가 보자 고 이야기하고 싶다.
너를 닮은 사람
내가 갖지 못한 또는 갖고 싶어 하는 부분을 가진 사람을 보면, 두 가지 감정이 든다. 하나는 가지고 있음에 대한 부러움이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지 못한 열등감이다. '너를 닮은 사람' 은 두 가지 감정으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나에게 늘 부러움이었어, 그때의 나에게 없었던 모습을 지니며 살아가는 너를 보며 그때의 내가 생각나 부끄러웠지만 그런 너에 곁에 있어 닮아가고 싶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 못났다고 심하게 자책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이유로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혐오하게 되는 생각에 빠졌던 때가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신 탓, 태어난 환경이 어쩔 수 없었다는 탓 등등에 돌려 큰 구덩이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면 계속 빠져 들어가는 때였다. 이랬던 때를 벗어나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구덩이에서 나와 일상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를 새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내가 가지고 싶었던 모습을, 외양적인 것도 있겠지만 밝고 긍정적이고 미래에 대해 단단히 잘 헤쳐나가는 사람이었다. 항상 볼 때마다 부러워했던 거 같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알게 모르게 그녀의 곁에서 맴돌며 친해지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하게 되면서, 그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단순한 부러움을 느끼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경험이 여러 번 반복이 되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모든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정말 전부가 아니구나. 각자 자신들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나만의 사정이 그녀는 그녀의 사정이 있듯, 쉽게 부러워하고 쉽게 열등감을 느껴 스스로를 큰 구덩이에 몰아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남의 떡이 커 보인다. 실제로 큰 것도 있다. 그러나 겉은 커 보여도 그 속은 어떤지 내가 경험해보고 대화해보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 것처럼 남의 떡도 그 사정이 있다는 걸 생각 한번 해보면 금방 지나가는 생각이고 감정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폐쇄되는 도시
아이를 버리는 부모, 그 아이를 데려가다 부모를 찾는 대신 키워준 할머니 둘 중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생각이다. 지금도 아이를 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은 일어나지만 더 이전엔 이런 일들이 생각보다 빈번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전단지를 나눠주는 부모의 모습, 유괴한 아이를 내 자식처럼 키우며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어 부모를 찾는 일, 오랜 시간 후 만난 친부모이지만 예전의 가족의 모습대로 돌아가기 힘든 것 등 한번 가족이 해체가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하긴 깨진 그릇을 이어 붙인다고 해서 원래 그릇의 모습이 될 수 없으니. 이 소설의 삼과 복 또한 가족이 가족을 버리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인 자신을 거두어준 할머니를 만났다. 피가 섞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고 한 집에서 살아가며 진짜 가족처럼 살았다. 비록 진짜 가족의 정보를 알려줬음에도 할머닌 찾아주지 않고 살아갔지만 말이다. 삼은 친부모를 찾았지만 더 이상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할머니와 살았던 어느 도시의 폐쇄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가게 되는데, 읽으면서 왜 굳이 할머니를 찾으려 갔을까, 자신을 거둬 살게 해 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부모님의 정보를 알려줬음에도 할머닌 무시하고 찾아주지 않았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 할머니를 만나려고 폐쇄될 도시로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자 했던 할머니 대신 폐쇄될 도시 안에선 삼은 많은 다른 할머니들과 마주했다. 그리고 함께 살았던 복이도. 많은 할머니들이 모이게 된 건, 고려장과 같은 이유였다. 가족이 가족을 버리는 모습이었다. 모인 할머니들은 알았을까? 자식들이 자신을 버리고자 했음을. 내가 낳고 키우고 한 집에서 살아갔던 자식들에게 배신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줄을 알았을까. 그래서 가족에 대한 일들은 겉으로 보았을 땐 정리할 수 있어 보여도 그 내막을 알게 되면 복잡해진다. 어느 누구의 탓도 잘못이라 이야기하기 어렵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상처만 받게 되는 것 같다. 삼과 복, 그리고 할머니들도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지만 한번 받은 상처 되돌릴 수 없기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에 폐쇄될 도시로부터 나오게 되면서 더 이상 받았던 상처에 또 상처받지 말고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하는 인간
'나는 이런 의도로 한 것이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타났어. 이건 실수였어.' 이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어떤 이는 '실수라도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이야기할 수 도 있으며 다른 이는 '실수였구나. 괜찮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아마 실수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에 대하는 말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실수하는 인간>에서도 주인공이 한 실수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타나고 그 결과 속에서 선택한 결정으로 주인공은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주인공이 겪었던 어린 시절은 학대받는 자신과 학대하는 아버지로 어느 누구에게 도움 요청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영역 안에서 자라게 된다. 이후 자신의 실수도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고 믿게 되면서 여인숙에 5년간 숨어 지내게 된다. 아주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던 그에게 새어머니의 죽음에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감정도 요동치고 주변의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된다. 아버지의 학대, 아버지의 죽음, 새어머니의 학대와 죽음, 하나뿐인 여동생, 여인숙 주인 그리고 그까지 어느 하나 사연이 있어서 그가 한 실수에 많은 결과를 초래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덤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에 여인숙 주인을 죽이게 된 것도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는 죽일 의도를 없었고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나에게 모든 잘못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니 순간적으로 죽였을 뿐이다. 실수한 거야.라고 생각하며 주인을 죽인 그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는 별의별 일들이 일어나고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실수 이든 고의든 '나'를 통해 일어났기에 남이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아도 스스로는 알기에 자신에게는 물어보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해야지 않을까.
돌아오다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제야 완전한 외톨이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그러나 그다지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 내게는 할머니가 남겨준 오래된 집이 있다. 이제 세상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있을 곳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자 힘이 된다. 집은 할머니가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준 구심점 같은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어느 밤 돌아온 가족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난 그날까지 어떤 마음으로 집을 지켰는지, 수를 놓으며 무엇을 견뎌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도 이 집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한없이 삐걱거리다가 언제 가는 부서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할머니도 돌아오고, 엄마도 돌아오고, 내가 만나지 못한 외삼촌과 외할아버지도 돌아올 것이다. 떠난 사람들은 언제고 돌아올 것이다. 나는 집을 지키며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본문 중>
떠나가는 사람과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 떠나고 남는 일은 흔한 일인데 느끼는 감정은 매번 달라지는 거 같다.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떠나는지 혹은 떠나지 않고 그곳을 지키는지 사정은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정을 알면 이해할 수 있지만, 알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올 것이라 조금의 희망을 품으며 그 희망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 그녀도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자신은 할머니가 느끼는 외로움의 보험이라 깨닫게 되며 살아가는 모습이 읽는 동안 씁쓸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라 혼자 살아가기 힘들고 외롭다고 하지만 사람과 사람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외로움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곁에 붙잡는 것이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중간마다 할머니가 내게 말하는 폭력적인 말들이 더 이상 내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라며 표현이 많았다. 그 말이 상처가 되지 않을 때까지 들었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왔을지를 생각하니 글 속엔 다 표현되진 않았겠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지 떠올리게 되었다.
이런 그녀에게 엄마의 떠나감의 사정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윤옥이라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지도 못한 정체모를 그녀를 등장시켜 잠시라도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가며 그 사정을 조금이라도 전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또한 자신을 떠나간 자식들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이 믿음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그 집에서 끝까지 버티며 살아갔던 것은 아닐까. 그 집에서 버티고 버틴 할머니의 사정을 알게 되니 그녀 또한 자신을 떠나갔던 이들이 다시 돌아올 이 집을 떠나지 않고 지키겠다 생각한 것 같다. 나를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버티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 같다. 솔직히 떠난 이가 얼마나 자신이 떠난 곳으로 돌아갈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다. 떠나간 이는 자신만의 사정으로 인해 떠난다고 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이는 다시 돌아올 이를 끝까지 기다리며 버텨간다. 다시 돌아온다는 확신은 없지만 말이다. 문득, 연어가 생각이 났다. 출산할 때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연어, 떠난 곳을 기억하는 것도 대단한데 거센 물결을 거스르면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돌아옴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나간 미래
사실 중간까지 읽었을 때, 그녀가 젊은 나이가 아닌 할머니이신데 기억에 문제가 있는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했던 건 지나간 미래를 꿈에서 꾼다는 거였다. 꾼 꿈속에서 차례대로 지났던 시간이 떠올리면서 그 모습이 지나친 과거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린 과거로 힘들어지기 전, 남편과 약속했던 서울역에서의 약속으로 돌아가 다시금 시작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런 그녀, 어머니의 곁에서 어디 있는지 찾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하고 보살폈을 아들은 가면 갈수록 힘이 부쳐 살아갈 힘이 점차 없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 상황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게 보여 읽는 동안 감정이입이 되었다. 마지막 아들이 한 선택에서 이 같은 상황에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있었지만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말을 하든 결국 어머니이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가족이라 할지라도 이 가족이 겪은 환경과 많은 일들은 제 각각 다르며 이후 어떻게 될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래도 가족이라는 관계 때문에 때론 잘못도 상처도 눈 감아 넘어가게 되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게 가족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곳에서 얼마나 먼
음, 다 읽고 나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사연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알게 된 진실로 인해 누군가를 찾아 용서를 구하는 것은 과연 용서가 되는 걸까. 이 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나 자신이 용서를 받을 입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반대의 내용이라면 너무나 괴로울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찾아 만난 오래된 친구, 제인을 보고서도 아는 체할 수 없었고 먼저 제인이 알아보며 통장을 건넸지만 받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또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는 제인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꺼낼 말들을 삼키게 되는 거 같다.
분명 어른이라면 부모라면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다른 누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도 그 상처를 알고 모른 척하며 지나가는 일들이 사라지면 좋겠다. 가해자는 잊지만 피해자는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한다는 말처럼 주는 상처는 기억에, 몸에 남아 때때로 나도 모르게 떠올려지게 된다. 만일 상처를 주었다면 시간이 약이라는 말 대신, 그럴 수도 있다는 행동 대신 진심 어린 사과와 그에 맞는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준 상처를 쉽게 잊으며 살아가지 않았음 한다. 이건 남에게만 하는 말이 아닌 나 자신부터 먼저 지켜야 할 말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빛나는 상처
여기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봐요. 기억나지 않을 때 노트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하지만요, 써놓고 다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가끔은 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본문 중>
그도 그녀도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다. 이 상처는 잠을 편히 잘 수 없었고 불면증을 주었다. 어떻게 이 불면증을 고칠까, 그녀는 매번 잠을 잘 수 있는 집을 전전하며 그는 엄마가 운영했던 식당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하며 잠에 들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런 상관없는 이 둘이 한 집에 지내게 되면서 알고 싶지 않았던 서로의 상처를 꺼내게 되면서 받았던 상처가 더 이상 어둠 속이 아닌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이 빛나는 상처인가.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는 때론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털어놓게 된다.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내 안의 어두운 방에 있는 상처가 빛으로 나오고 싶은 것인지 불쑥 털어놓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 때도 있다. 한번 이야기하면 그래도 속이 편해진다는 말처럼 신기한 경험을 통해서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하다는 마음이 들게 된다. 내 속에 있던 상처가 입 밖으로 나와서 내 속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도 생각하게 된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가족에게 꺼내기에는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볼지 앞이 뻔히 보이기에 이야기하기 쉽지가 않다. 가족들끼린 제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않을까. 가족에게도 이야기하기 힘든 것들이 있다는 걸 조금 이해해준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이야기를 꺼냈다면 어떤 일이든 이해해주고 내 편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싶다. 요즘 같은 때엔 서로서로 믿고 기대주고 이해를 받고 하는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걸 많이 느낀다. 이렇게 팍팍한 세상 속에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가족이라면 서로서로 위하고 기대해주고 들어주고 이해해주며 좋은 울타리 속 따뜻한 안식처로 느껴졌으면 좋겠다.
'Book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ok Review : 책 [당신 생각하느라 꽃을 피웠을 뿐이에요] (0) | 2022.06.03 |
---|---|
Book Review : 책 [식탁 위의 고백들] (0) | 2022.05.28 |
Book Review : 책 [빙탕후루] (0) | 2022.05.26 |
Book Review : 책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0) | 2022.05.25 |
Book Review : 책 [요즘 사는 맛] (0) | 2022.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