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여운 것들]
궁금해서 올려보는 질문, 세상에 '당연한 것/일'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진실한 생각이 궁금하다. 당신에게 '당연한' 일은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은 결혼을 출산을 취업을 등등 자신에게 당연한 것들을 답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들의 당연한 것들에 대해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어디 있냐며' 되레 반박하고 싶어 진다. 이런 생각과 말이 나올 때를 나는 안다. 바로, 당연한 것들에 대해 내가 불리한 입장을 가지고 있을 때. 불리한 입장일 때, 더욱 생각나는 이 말. '이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어?' 라며 반박하는 나의 모습이 문득 바로 떠올려진다. 물론 무턱대고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그만의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설명해 준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는 있으나,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도리어 나를 반박하게 만들어버린다.
휴, 대체 무엇이 이 세상에서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한 것들이 가득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언제까지 당연한 것들은 없다는 입장을 장착할 수 있을까. 이제는 이해해 달라고 말하기 대신, 용서가 허락보다 더 낫다는 말처럼 나에게 장착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를 가볍게 입고 벗는 수밖에. 가벼운 경량 패딩처럼 말이다. 가볍게 그리고 언제든지 벗고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생각도 그렇다고 들어주기를.
책 [가여운 것들]을 곧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과 예고편을 보고 궁금해 원작 소설을 읽기로 했다. 죽음에서 한 여성을 건져 올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여자, '벨라'와 벨라를 창조한 '갓'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 맥캔들리스가 주된 등장인물이다. 다시 살아난 벨라는 몸은 성인이지만 두뇌는 아이로 점차 자라나며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반응하는지, 갓과 맥캔들리스의 입을 통해 알려준다. 소설의 시대상이 19세기 스코틀랜드라는 점,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세계를 쌓아가는 벨라가 어떻게 이 시대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움을 가지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부유해진 영국과 주변 국가들, 부유해진 만큼 다른 분야도 채워지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그 시대엔 여성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살기는 어려웠기에 잘못되고 어긋난 기준을 가지고 있던 시대. 당연한 것들 속에서 당연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벨라의 시선은 뜬금없어 보여도 결국 문제의 본질을 남자들보다 제대로 꿰뚫어 본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어린이의 시선은 순수하기에 거짓이 없다'던 어느 말처럼, 벨라의 시선으로 본 세상은 당연한 것들 속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찾고 이에 맞는 새로운 의견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그때나 지금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나의 머리에 남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지독하게 부당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네. 그리고 자연 또한 너그럽지 못할 수 있어. 인위적인 도움 없이 살 수 없거나 아예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부자연스럽다고 일컫는 탄생을 자연이 얼마나 자주 만들어 내는지 자네는 알 걸세. 무뇌증, 쌍두증, 단안증, 그리고 너무 특이해서 과학이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는 기형들 말이야. 사람들은 산모가 이런 것들을 절대 못 보게 하는 것이 좋은 처방이라고 여기지. 어떤 기형은 덜 괴상하지만 똑같이 끔찍해. 소화관이 없는 아기는 탯줄이 잘려 나가자마자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이건 물론 어떤 친절한 손이 그 전에 질식시켜 죽이지 않았을 때의 얘기야. 의사 중에 감히 그런 짓을 하거나 간호사에게 지시하는 사람은 없어. 그럼에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네.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현대의 글래스고에서, 자신들의 조그만 아이가 죽을 때마다 매번 관과 장례식과 무덤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되는 부모는 극소수라네. 가톨릭조차도 세례받지 못한 사람들은 연옥에 보내지. 세계의 공장에서 연옥은 대개 의료 직종이네. 수년 동안 나는 버려진 시신과 버려진 뇌를 우리 사회의 쓰레기 더미에서 가져다가 하나의 새로운 생명으로 통합시킬 계획을 세웠네. 이제 나는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해서 벨라가 탄생한 거야."
_벨라 백스터 만들기, 75p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의 젊은 시절 일화들에서
_그녀가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1974년에 생존해 있는 후손들 가운데 맏이에게 보내는 편지
어째서 내 두 번째 남편은 고드윈을 아기가 비명을 지르고 유모가 달아나고 말이 겁을 집어먹게 만드는 외모의 괴물로 묘사했던 걸까? 갓은 슬퍼 보이는 얼굴의 덩치가 큰 남자였지만,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도 조심스럽고 기민하고 배려 넘쳐서 동물들, 작은 사람들, 상처입고 외로운 사람들, 모든 여자들이, 모든 여자들이 그를 처음 볼 때부터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꼈어.
_396p
혹시 그는 맥캔들리스가 내 성적 욕구 등등을 충족시켜 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유용하고 헌신적인 남편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런 남자라면 유약한 사람이어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왜냐하면 그가 나를 갓에게서 떼어 놓은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야. 사실, 혼자만의 가정을 이루는 걸 원치 않는다면 그는 갓이랑 나와 함께 살 수 밖에 없을 테지. 내가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그 하잘것없는 작은 난쟁이는 내 팔에 매달린 채, 자신의 어린 시절 가난과 의대생으로서 성공, 그리고 왕립병원 상주 의사로서 놀라운 성취들에 대해 내게 지껄여 댔다. 이 사람이 내게 필요한 남자일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발을 멈췄어. 그러자 그가 내게 키스하는 것으로 대응하더구나. 처음에는 수줍게, 나중에는 열정적으로. 나는 이전까지 남자와 키스한 적이 없었다.
_407p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은 이제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이 더 개연성이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 두 번째 남편의 이야기는 단연코 가장 병적인 세기라 할 수 있는 19세기에 존재한 모든 병적인 것들의 냄새를 풍기지. ~ 내 인생사에 대한 이런 극악무도한 패러디를 읽은 이후로 나는 계속 의문을 가져왔어. "아치는 도대체 왜 그것을 썼을까?"기관차가 가압증기에 의해 추동되듯, 아치볼드 맥캔들리스의 마음은 신중하게 숨겨진 질투심에 의해 추동되었어. 그가 말년에 얻은 행운도 그의 근본은 그저 "불쌍한 사생아 자식"임을 결코 막지 못했다._4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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