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모순]
새해가 다가오면 이전의 것에서 달라진 새로운 것들을,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새로운 부대엔 새로운 술을 담으라 했던 말씀처럼 말이다. 그렇게 다들 새롭게 바뀔 무언갈 기다리는데, 어째서 내가 속한 세상과 나에겐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지. 새로운 해가 다가와도 내 몸과 얼굴은 새롭게 변하는 게 아니라 이전과 같은 것 같다. 아, 변하지 않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새해가 되며, 새롭게 한 살을 먹음으로써 한층 늙어가는 과정에 새롭게 한 단계 올라갔다. 조금은 슬픈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모든 게 새로워지는 이번 한 해에는 나에게 긍정적인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굳건해지기를 바라면서, 이 말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가는 말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굳건해지기를 바라면서, 스스로에게 옳은 일이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를 자문자답하며 걸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굳건해지기를 바라면서.
책 [모순]은 주인공 안진진이 어느 날 아침,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라는 다짐으로 시작한다. 이 다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앞에 놓인 선택들 중,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더 나을 인생으로 데려가 줄지 이 과정을 쭉 보여준다. 작가는 안진진이 살아가는, 펼쳐지는 인생의 과정 속에서 주인공의 환경, 특히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환경을 자세히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시대상의 모습도 '가족'이라 불리는 다양한 모습도 '안진진' 한 사람의 다양한 생각도 '나'라는 사람에 대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묘사해서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마지막 안진진의 선택을 나는 이럴 것이다 하며 확신했었다. 그런데, 그 확신을 뒤집는 그녀의 선택을 보며 이 책의 제목인 '모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순', 알지만서도 그럴 수 없는, 앞뒤가 다를 수밖에 없을, 그녀의 선택에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였어도, 그녀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가올 인생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기에, 조금은 더 안정적이고 예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 않을까. 그래서 안진진의 선택을 마지막엔 이해했다. 그 모순이 그녀에게 행복과 불행을 체험하면서 나온 그녀만의 결론이라는 걸,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_생의 외침, 9p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_11p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_15p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어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_20p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_거짓말들, 28p
그러나 열다섯 살이 넘은 후로는 그렇게 착한 마음이 생기는 날이 참 드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_사람이 있는 풍경, 60p
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말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_64p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_75p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해서 어디 제멋대로인 꿈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잘 정돈된 남의 집보다 적당히 너저분한 남의 집이 묵어가기에는 훨씬 편한 법이다.
_77p
"안진진. 우린 지금 비밀을 나눈 거야. 너 반쪽, 나 반쪽.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네 것과 내 것을 서로 맞춰봐야 하니까 잘 간직해야 해. 두 개가 딱 맞아야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 안 맞으면 우리는 영원히 아빠와 딸 사이인지 모르고 슬프게 사는 거야."
_슬픈 일몰의 아버지, 88p
아버지는 부드러운가 하면 금방 사나웠고, 따뜻한가 하면 당장 차가웠으며, 웃고 있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폭포수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어도,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정신병자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때의 아버지가 진짜 안진진의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열 살의 안진진은 마음속으로만 다짐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아버지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포개서 두 사람의 손가락 길이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날, 그때 꼭 물어보리라고.
_92p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고,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_희미한 사랑의 그림자, 102p
"내 이름은 안진진, 할 때, 그리고 조용히 안진진을 찾으세요, 라고 말할 때 갑자기 그런 예감이 들었지. 아,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조용히 이 안진진이라는 이름을 부르겠구나, 하는 예감. 나한테 그런 느낌을 준 여자는 처음이었거든.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_114p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_119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_오래 전, 그 십 분의 의미 127p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_142p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끓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_불행의 과장법, 152p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_157p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_착한 주리, 173p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_180p
나는 정녕 그날의 다짐을 성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스물다섯이전의 졸렬했던 내 인생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내 삶에 전력투구하고 싶다는 그 가상한 각오가 이렇게 무너지는가.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전력투구할 내 삶의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결단 중에서 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_사랑에 관한 네 번째 메모, 217p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는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는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_218p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_크리스마스 선물, 268p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_씁쓸하고도 달콤한, 277p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없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_모순,295p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_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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