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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Book Review : 책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hyemhyem 2023. 11. 23.
책[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와 엄마는 성향도 성격도 외모도 서로 다르다.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만, 나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많이 닮았다. 첫째 딸은 아빠를 닮을 수밖에 없다는 법칙을 살아가면서 정확하게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아빠를 닮긴 하지만, 대화는 엄마와 더 많이 했기에 '역시, 나와 닮은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욱 끌리게 되는구나.'를 나는 피부로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물론, '여자'라는 같은 성이기에 엄마와 더욱더 친해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알아가면서 '다르면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때, 호감도가 급속도로 올라가기도 하니깐. 어쨌든, 많은 것들이 나와 다른 엄마와 대화하면 할수록 엄마의 숨겨진 인생을 알면 알수록, 그녀와 내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이 우리 사이의 선을 긋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게 해주는 조금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해 준다. 이 마음이 이해의 바탕이 되어서, 그녀와 나 사이에 또 다른 점을 발견할 때마다 받는 충격을 완화해 주는 쿠션이 된다. 나는 이 쿠션을 가질 수 있게 된 점이 다행이고 좋다.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다양한 면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그녀들을 만날 때마다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모든 경우에 다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너무나도 나와 다른 그녀지만, 서로 말을 이어가며 대화할 수 있음에 서로의 생각을 인생을 가치관을 나눌 수 있음에 좋다, 이해와 인정이 없어 서로에게 선을 그어 오해하는 사회보다 말이다.

 

책[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자들의 관계에 중점을 두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와 딸, 회사 직장 동료, 이모와 조카, 대학 강사와 학생'로 2명의 여성의 관계가 미묘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설로 나에겐 읽혔다. 특히,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일 년> <답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네 편의 소설이 가장 마음에 남고 기억에 남는 문장도 많았다. <일 년>에서는 편한 이가 없던 직장에서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수 있었던 직장 동료인 인턴을 만난 주인공의 감정이 잘 흡수할 수 있도록 글을 쓴 것 같다. <답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는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말로만 가족인 관계로 남아버린 이야기로 느껴졌다. 때론 가족이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는 걸, 가족이기에 진짜 속 마음을 꺼내기 어렵다는 걸, 가족 간의 흩트려진 일은 너무 꼬여진 실이기에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준 소설이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아무 희미한 빛으로도>는 내가 느끼기에 전형적인 여성 소설(?) 형식으로 읽혔다. 이게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다른 소설에서도 발견했던 것 같다. 누군가 먼저 나의 길을 앞서 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먼저 걸었던 길이 내가 갈 길이지만 때론 다른 길을 걸을 거라는 그런 희미한 희망(?) 같은 생각이 생긴다는 것. 하지만, 그 생각이 희미했다는 걸, 그 길을 걸으며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생각이 난다라는 이러한 방식을 다른 소설에서도 많이 읽어서인지 조금은 담담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7편의 단편 소설을 읽으며 혹 여성 간의 관계성에 관한 책을 읽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강력 추천까지는 아니지만 한 번 읽어도 괜찮을 책인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문장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음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_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43p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_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44p

 


선배.

네.

우린 말이 참 잘 통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저 아껴준 거 알아요. 전 선배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데.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_일 년, 120p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_답신, 150p

 

그 이후로 그건 우리 둘이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또 다른 인사가 됐지.

사랑해.

언제까지?

영원히, 영원히.

너는 마치 작은 사탕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녹여 먹듯이 사랑이라는 말을, 영원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기를 좋아했어. 너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나도 네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걸 알았지. 그리고 내가 너에게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던 것 같아.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든지,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는 너를 사랑하리라고 느꼈던 거야.

_답신, 152p

 


 

마이클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기남을 바라봤다.

"부끄러워요?"

기남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한동안 마이클을 가만히 바라보다 기남이 입을 열었다.

"...... 잘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줘."

"부끄럽냐고 물어봤어요. 할머니, 부끄러워요?"

기남은 아무 말 없이 마이클을 품에 안았다. 아이에게서 시큼한 땀냄새가 났다.

"...... 응. 그런가봐."

그렇게 대답하고 기남은 불현듯 이해할 수 있었다.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할머니."

기남의 품에서 나온 마이클이 기남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에밀리?"

"내 여자친구요."

마이클이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기남은 조심스럽게 마이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가 우경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이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_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31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