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밤의 반만이라도]
책 [밤의 반만이라도]는 8개의 단편 소설, 퀴어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에 읽었던 퀴어 소설인 경우, 퀴어에 더욱 중점을 두어서 그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고 나아가고 있는지를 말한다면 이선진 작가의 이번 책은 퀴어보다 등장한 사람 하나에 좀 더 집중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특히 작가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내 못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라는 사람에서 오는 슬픔을 몰래 버리고 싶었다.' '사실은 이 마음을 들키고 싶었고, 아무렇지 않다고 알아주기를 바랐다.'라는 문장에서 '나'라는 사람을 내가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구나. 나라는 사실이 때론 버거워서 어딘가 나를 모르는 곳으로 몰래 버리고 싶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상한 것이 아님을 잔잔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이 이 글에 여과 없이 보여 고마웠다.
그리고 8편의 소설이 한 영화의 기승전결 구조처럼 이어져 있어서, 읽는 이의 감정과 글을 읽는 흡입력이 가면 갈 수록 절정에 이르고 마무리되는 그 과정이 매끄러운 미끄럼틀을 탄 것 같아 말끔한 기분이 들었다. 이 말끔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책을, 그리고 그런 느낌을 내는 책을 쓰는 작가를 새로 알게 되어서 더욱이 반갑고 앞으로가 궁금해졌다.
작가의 말 가운데,
돌이켜보면 20대의 나는 내 못생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늘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이 나를 압도할 때마다, 마음이란 걸 조금씩 소분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에 몰래 버려두고 싶었다.
_323p
사실은 간절히 들키고 싶어서 숨었다고,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걸 알아봐주길 바랐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_324p
겨울을 잘 나기 위해서는 너무 추운 겨울과 내복이, 밤을 잘 나기 위해서는 너무 캄캄한 밤과 이불이 필요하듯, 나를 잘 나기 위해서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필요하다는 걸. 남부끄러이 망가져버린 세계일지언정 그 안에서 나는 나로서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_325p
기억에 남는 문장
부나, 나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하나. '나'라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다는 걸 남의 이야기를 통해 읽는 내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때, 그 물건이 내가 인식하는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약간의 왜곡이 들어간다는 걸, 눈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의 성정체성도 타인의 성정체성도 아니 그 외의 것들을 내가 직접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할 수 있을까.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 의해 정확히 그걸 마주하게 됐을 때, 어떻게 나는 그걸 마주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음, 어떻게 하지 못함을 우리는 아니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다가가야 하는 걸까. 읽고 나서도 계속 곱씹게 되어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 정말 반성해야 할까, 이지씨?"
"쌤, 혹시 [회복하는 인간]이라는 책 아세요?"
"뭐 무슨 인간요?"
"반성하지 말고 회복해요, 우리.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마시고 죽죠. 2주 동안 출근도 안하는데. 자의는 아니지만 마치 자의인 것처럼. 작정하고 한번 죽어보죠, 오늘."
_19p
추우면 언제든지 춥다고 말하라 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더웠으므로, 안 그래도 술기운 때문에 얼굴이 홧홧한데 아래에서부터 둔부가 얼얼할 정도로 들끓는 열기 때문에 나는 정말 미칠 듯이 더웠으므로, 그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더위였으므로,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열과 성이었으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 존나 더러워."
_28p
그러나 단언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것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음의 상태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무수히 많은 것들 사이에서, 그날 밤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다시는 그들을, 오직 선의로서 내게 가장 따뜻한 자리를 내어주던 형씨와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애써 만든 눈사람을 부수던 빠다를,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각 무사할 수는 있어도 함께 무사할 수는 없을 테니까.
_36p
이따금 엄지와 검지 사이가 욱신거리는 통증이 찾아올 때면 우리의 마지막 승부 때 부내가 내밀었던 손을 떠올렸는데 그건 가위인 동시에 나를 정확히 겨누고 있던 총이기도 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덕분에 내 마음에는 구멍 하나가 뻥 뚫렸고, 행여나 하늘에서 뭐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구멍이 너무 시려서 혼자 마라탕을 먹으러 갔다.
_45p
나니나기
그나저나 왜 플러스 통장이란 말은 잘 안 쓸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였다. 무언가 더하고 쌓고 모으고 이루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그 당연한 게 내겐 당연하지 않았다. 부당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사람은 남탓을 했다.
_62p
그런데 나니 너는 무슨 소원 빌었어?
연휘가 물었고 나는 올겨울을, 또 이런 나를 무사히 나게 해달라 빌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_79p
보금의 자리
내가 좁아터진 집에 사니까, 안 그래도 좁아 죽겠는데 너랑 붙어 있느라 더 좁아터진 집에 사니까 내 속도 이렇게 좁아터진 거라고. 네가 나랑 사는 게 왜 살 만한지 알아? 너 나랑 이러고 사는 것 같아도 사실 잘살잖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방 넷 화장실 둘 딸린 상암 본가로 돌아갈 수 있잖아. 집도 속도, 맘만 먹으면 네 맘대로 넓힐 수 있잖아.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이라고? 그럼 어쩔 수 없이 평생 그런 경험만 하고 사는 사람들은 뭐야? 그 사람들은 뭐가 돼? 그리고 뭣보다, 너한테 나는 뭐야 대체?
_104p
근데 말이에요, 희본 씨. 소정 씨가 그러는데 북향도 빛이 안 드는 것도 다 괜찮으니까 꽃이 필 때까지만 버리지 말고 있어달라네요.
언제 피는데요, 꽃이?
4월이라네요.
그럼 자신은 없지만 한번 노력해보겠다고 전해주세요.
역시 희본 씨는 마음이 넓다네요.
아뇨, 원래 마음이 되게 좁은 편인데 실평수가 잘 빠져서 그래요.
웃으라고 한 소리인가요?
네. 웃으라고 한 소리예요.
_112p
망종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할머니의 고백에 이 자식들은 이 자식이 되었다. 수창과 수만이 떠나고 수철만 남았다. 남았다고 하기엔 너무 멀고 무심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더는 찌그러뜨릴 게 없다는 것. 더는 파괴하고 손상할 무언가가 없다는 것. 그건 내가 살면서 처음 느낀 부끄러움이었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죽지도 않고 또 왔다. 어제도 오늘도 아마도 내일도.
_122p
무관한 겨울
단편들 중, 작가가 연인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픈 소설로 느껴졌다. 이상적인 완벽한 연인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상황 가운데 그대로 있지만 서로의 곁에 남아 있어 주는 사이를 잔잔하게 내용 곳곳에 보여준다. 직장 내,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잘못처럼 느껴지는 죄책감을 자신의 발에 바늘을 찔려 피를 내야만 짓누르는 마음에서 조금 숨을 쉬는 연인에게 '나'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알겠다 건네는 말과 물컵이 이 둘의 관계를 가늠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의 작가의 표현이 과하지 않아서, 그냥 평소와 같은 연인 같아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서 좋았다.
직장을 잃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영문은 내게 바늘을 쥐어주며 말했다. 자기 발바닥을 좀 찔러주면 안 되겠냐고. 나는 그게 체했을 때 손을 따고 부항을 뜨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알겠다고 했다. 제대로 된 연인이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생판 남이 저지른 일에 부러 죄책감을 독박 쓸 필요는 없다고, 최대한 설득도 해보고 뜯어말리는 게 정상이겠지만 왜일까 나는 물 좀 떠오라는 말에 물이 반쯤 찬 컵을 건네듯 알겠다고 했다. 행여나 영문이 억울이라는 단언의 이응 자라도 꺼낸다면 찐한 피를 보게 해줄 테다 결심하기도 하면서.
_164p
그렇지만 온밤 동안 벽을 보고 서 있던 그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인영은 생각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세잎클로버 개수를 세다 보면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달리 마음이 편안해졌으니까. 무엇보다 천장과 벽이 맞닿은 부분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했을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건 단지 프린팅이 잘못돼서 생긴 불량이나 하자에 불과했겠지만, 인영은 그런 순간이 있었기에 여태 자신이 떠밀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거라 믿었다.
_169p
밤의 반만이라도
어쩌면 그날도 너에게 내 마음을 들켰는지도 몰랐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금을 침범한 네 손끝이 내게 닿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필요조건이 누군가를 처음 본 순간이 아니라, 눈을 감아도 누군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_190p
"그거 아니? 사람들은 누구나 밤을 갖고 태어나. 갓난아이 속에 갓 난 어둠이 있는 셈이지. 그런데 사람의 몸속에 밤이 심겨 있는 건 아주 잠깐뿐이야. 보통 사람들은 탯줄처럼 밤과 연결되어 있다가 밤에서 버림받아. 너도 그렇고. 그런데 나랑 내 딸은 버림받지 않았단다. 밤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선택했고, 내가 계속 밤을 품고 있기를 선택한 거야. 너,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지? 천만에. 나는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차 있는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어. 다 내 밤 덕분이지. 그리고 너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이담에 나는 내 딸한테 내 밤을 물려줄 거란다."
_203p
고독기
제목은 고독한데, 주인공과 엄마의 관계가 나와 우리 엄마의 관계 같아서 웃으며 읽었다. 뭔가 애증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구 꺼내면서 서로 먼저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러지 못해 결국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해버리고 마는. 비슷한 입장에 있다 보니, 읽으면서 자꾸 우리 엄마를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화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하면서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가족이라, 딸이라, 엄마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해서 대화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참으로 익숙해버렸다. 그래도 대화가 없는 모녀관계보단 나으면서도 때론 대화 없이 이해 없이 지내는 게 더 편할 때도 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 우리 어머니. 참, 나와 같은 경우가 이 책에서도 있어서 반가웠다.
다른 사람과의 거리 두기는 너끈히 해낼 수 있었지만 나는 나 자신과의 거리 두기가 언제나 힘에 부쳤다. 한때는 내 우울과 고독에 전염되기를 서슴지 않았던 전 애인들도 이별의 순간이 다가올 때면 하나같이 일보 후퇴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 그냥 네가 너무 너라서 그래.
내가 너무나도 나라는 것. 나는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 아닐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가끔 나 같은 건 그만하고 싶었다.
_240p
일은커녕 나는 점점 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았다. 딱히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라는 질문 따위는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고 꺼내보려하지 않았다. 비록 난독증이 있긴 해도 살면서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내 마음을 읽어내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껏 어찌어찌 살아오면서 알아낸 사실은 내겐 읽어낼 만한 거리가 별로 없다는 거였다. 내 삶에는 의미 있는 문장보단 여백이 많았다. 무언가로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아니라 텅 빈 채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여백이었다.
_243p
과묵하고 소심한 걸음걸이로나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좋아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내 삶의 애독자가 되어가고 싶었다.
_263p
생사람들
언니가 내 머리통을 베개에 더 세게 더 깊이 파묻는 동안 바깥에 눈이 왔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 가끔은 내가 안다는 걸 모르고 싶었지만 내가 이토록 나인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내가 잘못했어. 언니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데 할머니가 부옇게 번진 창밖을 가리키면서, 이미 알고 있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알게 하면서 중얼거렸다.
저기 망설임이 어정어정 날 데리러 왔네.
_299p
* 자음과모음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