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 책, 민용준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
민용준 인터뷰집
'만약 내가 인문 관련 전공이 아니라 예술 관련 전공을 선택했다면, 예술 분야의 일을 하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남몰래, 살짝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 적이 있다. 과연 미술 입시라는 무시무시한 과정 속에서 내가 살아남아 전공할 수 있었을까, 물으면 '음... 글쎄'라는 답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아마도, 예술 관련 전공을 선택했어도 졸업할 때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고민에 고민을 따라갔을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 생엔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있는 예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꽉 잡기를 바란다. 물론, 다음 생이 있다면 말이다.
이처럼 예술은 겉으론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지만 점점 가까이 갈 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미로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을 읽으며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문장이나 장면이 나올 때, 감독이나 작가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진짜 대단하다!'라고 자연스럽게 존경의 대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부럽다. 그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길래, 이런 것들이 나타날까 또는 이 정도는 해줘야 생계유지를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아무나 영화감독이 되고 아무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구나. 그래서 나는 다음 생을 노려보도록 스스로와 합의를 봤다. 이 합의가 다음 생의 나에게 전달되어 나도 예술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이라는 꿈을 한 번 꿈꿔본다.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는 13명의 영화감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한 감독을 대상으로 그의 감독, 작품 세계관을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세세한 인터뷰를 진행한 민용준님의 진행으로 알고 싶었던 감독의 어느 부분까지 알 수 있게 되어 굉장히 나는 좋았다. 특히나,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때마다 다시 보는 영화들 중에 이 두 분의 영화가 있기에 작품 이외에 감독의 입으로 들어보는 작품의 내용이 한 층 더 작품을 생생하게 만들어주었다. 보지 못한 영화의 여러 다양한 감독들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서도 그만의 작품 세계관이나 작품을 대하는 감독의 생각과 태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 등 자세하게 알게 되니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더 깊게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데,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이들의 손길과 수많은 시행착오와 작품을 구성하는 수많은 재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작품이 탄생하고 이후 만나게 될 수많은 관객과 그들의 반응과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생각하니, 한국 영화가 더욱이 더더 발전하기를 바란다. 혹시 좋아하시는 영화가 이 인터뷰집의 감독 작품이라면 읽어보시길 권한다. 봤던 영화도 이 책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다시 떠올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음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by 질문에 답을 중심으로
박찬욱 감독 : 미완의 세계를 파고드는 일관된 시선
A) 영화는 크고 작은 단위에서의 리듬이 중요해요. 항상 그런 리듬감을 생각하며 편집하고 음악을 써야 하죠. '특정한 시퀀스에서 어떤 리듬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각본부터 연기를 포함한 모든 면을 종합해 계산해야 답할 수 있어요. 그런 리듬감이 잘 형성돼있다면 세 시간짜리 영화라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니까요. 결국 어느 단계까지 발전한 감독들은 그런 세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 단계 더 질적인 비약을 이룬다고 보고요.
A) 어쨌든 항상 중심에 사랑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스토커>도 그렇고요. 그래서 왜 사랑 얘기를 하느냐고 묻는 건 저에겐 너무 싱거운 질문이 되는 거죠. 제가 새로운 일을 한 게 아니니까요. 이 세상 모든 일과 인간관계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모든 행복과 고통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_205p
A) 디테일에 목숨을 거는 태도가 저를 매료시킨 거 같아요. 냉혹하고 비정하게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플레이어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론 자식처럼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면밀하게 지켜보는 초조함도 느껴지는데 그 역시 감독의 심정과 비슷한 거 같고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렇게까지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이런 자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게 말이죠. _223p
A) 그렇죠. 이 역시 어쩔 수 없이 사랑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악순환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도 해법이 있다면 끝내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만든 대사인 거죠.
A) <리틀 드러머 걸> 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뤘지만 정체성의 혼란과 연기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제가 늘 관심을 갖게 되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봉준호 : 여전히 나아가고 다다를 경지
A) 하여튼 오스카에서 언급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대학 동아리 시절에 읽었던 크리스틴 톰슨의 책 [비열한 거리] 에 그렇게 정확히 쓰인 문장은 아니고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아무튼 제가 모토로 삼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영화 산업에 뜻을 펼치고 싶은 젊은 창작자가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산업적 압박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면 '이렇게 하면 관계자들이 환영하겠지? 투자자는 이런 걸 좋아하겠지? 제작자는 이런 걸 원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휘둘리다가 자신만의 에센스를 잃기 쉽죠. 그래서 오히려 가장 개인적인 관점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특강 같은 걸 하게 되면 이런 얘기를 많이 해왔어요. 그런 생각이 시발점이 된 거 같아요. _281p
A) 사람들은 영화의 내러티브가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길 원하지만 현실은 의외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인과응보라는 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현실이 대부분인데 영화에서는 그러길 바라기도 하고요. 어떤 관객들은 그래서 <기생충>의 죽음을 영화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요. 기정의 죽음도, 동익의 죽음도 영화적인 해프닝으로 구축된다는 인상을 넘어 현실적인 우여곡절로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인상을 느끼는 거죠. 영화로 도피한다고 생각했는데 되레 현시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을 느낀다고 할까요?_310p
A) 물론 나쁜 짓이지만 그 무지한 시대에 그런 직업을 갖고 살아가면서 그 따위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도 함께 보게 되는 거니까 그 사람을 악마처럼 증오하기보단 짜증나고 답답한 인간이라 혀를 끌끌 차게 되면서도 이상한 측은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죠. 다만 그렇게 느끼는 측은지심은 현실에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고요.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를 보면 우리가 단죄해야 할 사람들을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부작용들이 있잖아요. ~ . 영화는 그런 걸 다뤄줄 수 있는 매체인 거 같아요. 역사적으로 이뤄져야만 하는 처단이나 응징은 법률과 정치와 사회과학의 세계에서 준엄하게 해줘야 하는 몫이고요. 영화나 소설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그 조그만 틈새를, 단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틈새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 아닐까 싶어요. _312p
A) 처벌이라는 단어는 좀 거창한 거 같고 그냥 삶 속에서 치르는 대가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요. 개인이건 집단이건 어떤 대가를 치르긴 하잖아요. 그런 대가에 대한 영화적 표현인 거죠. 그리고 사람의 인생에서 그런 대가를 피하는 건 힘든 일 같아요. 빨리 찾아오거나 늦게 찾아오거나 혹은 저지른 것에 비해 덜 찾아오거나 과하게 찾아오거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삶에 따르는 대가는 있는 거 같아요. 그게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두렵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고요. _313p
윤가은 : 어린 눈망울에 비춘 우리라는 세계
A)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 생긴 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은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원하는 형태대로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아이들도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꽉 붙들고 있던 문제를 딱 놓아버리는, 일종의 포기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또 다른 도약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어요. 다만 이 과정이 너무 아픈 것뿐이겠죠. 우리 집이 이렇게 찌그러진 모양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 그 아픈 순간을 지나온 아이들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에서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길 바랐어요. _376p
이옥섭 : 엉뚱한 발상과 기발한 착상의 연대
A)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게 규칙적으로 쌓일 수 없는 것이기에 필요한 시험이라 생각했어요. 그런 일을 겪은 뒤에 만나게 될 상황 속에서 꾸준히 진실을 판단해야 할 윤영이를 위해 마련한 준비 운동 같은 것이기도 하고요. _518p
A) 우리에게 진실이라고 툭 던져진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다 당연하다고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상처받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상처가 내게 올 수도 있는 거니까 좀 더 지켜보면서 그게 믿을 수 있는 진실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진실을 알게 됐을 때 관객 역시 함께 진실을 알게 된 셈이니 그게 용기를 주는 진실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_521p
이와이 슌지 :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과 온정 사이
A) 우리는 가족을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처럼 여기는데 사실 가족 또한 우연히 만들어진 관계에 불과합니다.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 여기지만 정해진 운명에 놓인 관계라고 볼 순 없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시작하니까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운명적 관계 안에서 내가 너를 지배해야 한다는 알력이 형성되고요. 그런 관계란 인간과 인간이라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는 폭력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면, 누구와 함께해야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지, 그런 행복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립반웡클의 신부>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런 행복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알려주고 싶었고요. _535p
이종필 : 기다리지 않고 짚어오며 만난 시간
A)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 걸까?'라는 봉현철 부장의 대사도 그때 나왔죠. 그러니까 90년대가 저에게는 분명 좋았던 시절이지만 그 이면에는 무지하고, 무식하고,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야만적인 부분들도 꽤 있었던 거예요. 그 시절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 시절에 대한 좋은 향수도 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깝깝한' 일도 많았고요. 그래서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과연 돌아가고 싶을까, 그런 것들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어요. _5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