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Book Review : 책[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hyemhyem 2023. 11. 10. 12:46

 

 

책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리뷰

 

 

 오랜만에 리뷰를 작성한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떻게 내가 느낀 감정을 기록했는지 초기화됐다... 다시금 그 느낌을 불려 오려고 하니 잘 안된다. 그래서 안 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는 느낌으로 리뷰를 기록하기로 했다. 계속 기록하다 보면 정리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기대를 가지기로 했다. 나의 기대가 조금은 오래가기를.

 

 추운 날씨가 찾아올 때마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바로 씁쓸함과 차가운 사랑. 몸만 추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차가워져서 느끼는 감정이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시기는 연말, 한 해를 정리하다 좋았던 기억보단 아쉬운 기억이 떠올라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이럴 땐, 따뜻한 국물 음식을 먹거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를 정주행 하면 마음이 뜨끈해지지만 가끔은 찬 바람이 숭숭 불어 시린 마음을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하다. 쓸쓸하고 씁쓸한 기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나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책과 드라마, 영화를 멍하니 생각한다. 음... 최근엔 드라마 '안나'가 내 머릿속에 앉아 있어 씁쓸한 생각에 반응한다. 어떤 작품이든 마냥 행복하게 즐거운 결말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이 내 마음에 더 들어온다. 시기와 날씨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나를 툭 건들어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는 작품일수록 나는 오랫동안 그 감정을 간직한다. 가끔 다가오는 감정에 맞춰 나를 휘몰아치게 만든 작품들을 떠오르며.

 

 책[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은 내게 씁쓸하고 쓸쓸한 감정을 건네줬다. 임솔아 작가님의 소설집으로 이전 영화 '최선의 선택' 리뷰 영상을 보고 꼭 읽어봐야지 했는데, 다른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적었던 메모를 살펴봤다. '감정이 묘한 소설, 멍하니 주어진 상황, 감정을 가만히 바라보게 만드는 소설.' 각각의 단편 속 주인공, 사건, 배경 등이 조용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집은 독자가 제삼자의 눈으로 소설을 바라보게 만들고 감정은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 감정이 그대로 내 마음에 안착한 이 느낌이 읽는 동안 잔잔히 이어졌다. 단편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서서히 펴져가는 감정이 책을 읽은 후에도 끝까지 이어져서 여운을 오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추운 날씨와 잘 어울리는 소설집을 발견해 뿌듯했다. 잔잔한 여운을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책[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을 추천한다.

     

 

 


 

기억에 남는 문장

 

 

#그만두는 사람들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과 함께할 때가 나는 편안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신입생 때 나처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뿜어대는 동기들이 가장 좋았듯이.

-27p

 

#초파리 돌보기

 

 "요즘에도 잊어요?"

 "이유를 잊는다면서요."

 "이유를 잊게 되는 원인이 있을 거예요. 스트레스 상황이 반복되면서 단기 기억력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유를 잊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워진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치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원인과 이유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종내는 알게 돼요. 그 불일치가 나한테는 원인인 것 같아요."

-64p

 

 

#중요한 요소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확대해가며 소민은 치온의 집을 살폈다.

 "생활 간지가 좀 있네요."

~

생활 간지가 넘쳐야 인물과 배경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소민은 말했다. 

-80p

 


#희고 둥근 부분

 

 민채가 또다시 손목을 긋고 교무실을 찾아왔던 날, 진영은 민채를 양호실로 보냈다. 민채의 상활을 상담 센터에 알리고 전문가를 통한 치료를 진행하겠다고 통보했다. 민채가 말했다.

 "하는 척은 할 만큼 했다는 건가요."

-118p

 

 "너는 네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진영은 로희에게 물었다.

 "살리려고 노력했더라면. 그 기억은 남아 있겠지."

-124p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

 

 어떤 웃음은 타인을 향해 수천 개의 화살처럼 발사되었다. 앉으려던 나의 뒤쪽에서 짝궁이 내 의자를 뺐을 때, 넘어진 나를 향해 주변 아이들이 일제히 웃었던 것처럼. 어떤 웃음은 핏방울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또 다른 아이가 또 다른 아이의 의자를 뺐을 때, 넘어진 아이가 뒤통수를 움켜쥐고 함께 웃으며 일어서는 것처럼.

-129p

 

문학은 적어도 인간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좋아하고 흠모하면서 읽었던 많은 작품은 인간이 품은 진실이라거나 각자의 입장 같은 것을 끈질기게 탐구할 때에 빛을 발했다. 나는 이미 그런 빛에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였다.

-142p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아란과 문경은 언젠가부터 서로에게 이 말을 반복해왔다. 아무것도 아냐. 어떨 때는 미세한 한숨을 섞어 이 말을 했고, 때로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기도 했다. 반복할수록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게 되어갔다.

-204p

 

 "괜찮아?"

아란은 문경에게 물었다.

 "뭐가."

 문경이 아란을 쳐다보았다. 문경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눈빛에 냉기가 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에 아란은 문경에게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사용했다.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일이 아란에게 선을 넘어 침범을 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미안함이 엄습해왔다.

-207p

 

 

#단영

 

 효정이 하은사에 온 이후로 처음 얻은 깨달음은 불경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이었다. 출가를 한 승려는 무성의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규율은 누구나 다 아는 전제 조건이지만, 비구니는 결코 무성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신도들은 이상적인 여성성을 하은사에서 만끽하고 싶어 했다. 효정은 그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 쉬웠다.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하은사는 유명한 비구니 사찰이 되었다. 효정은 은사지만 은사 스님은 세번째 서열인 효정을 주지로 택했다. 비구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온화한 미소였다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효정의 승리였다.

-260p

 

열일곱 살의 아란은 유난히 밝은 어둠과 유난히 어두운 어둠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지붕 위에서 아란이 할 수 있는 놀이는 그것밖에 없었다. 아란은 어둠을 분류했다. 유난히 흔들리는 어둠. 유난히 시끄러운 어둠. 가장 짙고 지나치게 적막해서 오히려 마음이 다 개운해지는 어둠.

-26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