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 책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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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무엇을 할 때만 ~해진다.’ 이 문장에 무엇과 물결에 넣은 단어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각자마다 만들어지는 문장은 달라지겠지만, 나에겐 ‘문제를 생각할 때만 옳다 믿는다.’라고 쓸 수 있겠다. (문맥상 어색하지만 일단은 한번 써본다.) 스스로 생각하기엔 난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작은 생각부터 큰 생각까지 내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찬다. 생각이 많다 보니 생각의 양에 비해 행동과 말이 비례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한다. 말과 행동보다는 생각이 많고 그래서 생각할 때에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이런 나의 특성으로 책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라는 제목이 공감이 되었다. 사람은 참으로 복잡하다. 길 속은 알아도 사람의 속은 모르겠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달라지는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모습이 사람에겐 참 다양하다. 때론 다양해서 좋다. 그게 더 인간적이게 느껴진다. (지금 이 말도 뭔 말인지 싶지만…) 그래서 이 책이 인간적이게 느껴졌다. 실제 말로 전하기에 민감할 수도 있는 부분을 글이라는 통로로 솔직하고 내밀하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나에겐 인간적이게 느껴졌다. 그리고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는 그의 말이 자기 성찰, 자기 고백의 형태로 그의 글 속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책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는 사회학자인 조형근 저자는 3부에 걸쳐 대한민국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1부에선 대학과 지식인, 그리고 청년 2부에선 민주주의 리부트? 마지막 3부에서는 간단하지 않은 대안으로 한국 사회를 깊숙이 들어다 보며 설명한다. 현재 한국의 사회 모습을 분석하면서 다양한 분석 사례와 역사적 내용으로 자세히 분석해 쉽게 읽기보단 지금의 한국 사회 모습을 떠올리며 읽으니 이해가 되었다. 특히나 이번 대선 결과와 기성세대와 청년의 관계에 대한 저자에 생각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봤다. 지금의 나는 청년이고 여성이고 4년제 대학 졸업생이며 중간인 가정 속에서 자라온 등등 나의 배경과 환경을 생각하며 그의 글에 나를 적용할 수 있었다. 더불어 청년이라고 해도 다 같은 청년은 아닐 것. 청년 안에서도 똑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것, 다 같은 청년이라는 말로 묶을 수 없다는 것. 수많은 정치인들이 청년들을 위한 정책과 배려와 기회를 주겠다 하지만 더 이상 기성세대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 정말로 청년들을 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알아서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 속에서 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성찰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전에 어느 한 영상을 봤다. 그 영상 속에선 유시민(작가님이라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서) 작가님이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인상 깊었는데, ‘더 이상 기성세대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청년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라’며 돌아보는 말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말로 꺼내는 건, 어떤 사람이 든 간에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책 속의 저자도 자신을 돌아보고, 이 책을 읽는 독자인 나도 나 자신을 사회 속에서 돌아보게 되었다. 돌아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대 사회를 갈구한다는 그의 말처럼 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기를 지켜본다. 그 속에서 살아갈 나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해서.
기억에 남는 문장
글을 쓸 때면 정의를 찾게 된다. 그렇게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내 삶이 글처럼 정의롭지 않다. 그 격차를 부끄럽게 고백하되, 그 사이 긴장과 모순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수밖에 없다.
- 프롤로그, 7p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1부, 지식인의 죽음 37p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른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 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68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
- 1부, ‘20대 남성의 보수화’와 86세대의 책임 68p
쉬운 답은 없지만 ‘청년’이라는 이름과 이별해야 할 때가 온 것은 분명하다. 사실 좀 늦었다. 가난해도 열심히 일했고, 폭압 속에서도 투쟁했다던 20세기 청년의 신화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청년의 신화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되, 청년을 내세우는 세대 담론과 선을 그어야 한다. 청년 일반과 기성세대 일반을 대립시키는 시도들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편에 전문직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관리받고 성장하면서, 부모의 자산과 지위를 물려받는 일군의 청년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 중하층 이하의 가정에서 자라며 국가장학금과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대학 나와 중소기업을 다니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또 다른 청년들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의 집단일까? ‘모든 약자들의 연대’라는 새로운 전망 속에서 ‘젊은 약자’들의 처지를 의제화하고 공감의 폭을 넓혀야 한다. 청년에게 안녕을 고하고, 젊은 약자에게 안녕을 물어야 한다.
- 1부, 청년세대에게 고하는 안녕 92p
빈곤 가족을 만나온 사회학자 조은은 빈곤의 원인을 이들의 생활 습속, 즉 빈곤 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들과 선을 그으면서, 가난의 원인은 가난 그 자체라는 통찰력 있는 동어반복을 제시한 바 있다.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세계화된 구조적 위기의 충격을 흡수할 수 없다.
- 2부, 사당동, 철거 이후의 그 가족과 나 156p
선을 지키고 싶은 중산층의 눈에 이 선 너머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미디어와 정치의 관심도 얻지 못한다. 병목을 통과할 ‘자격’을 얻지 못한 삶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삶인가?
- 2부, 선을 지키는 사람들, 선 너머의 사람들 197p
모욕, 수치심, 분노, 경멸과 같은 태도와 정동들이 도처에 난만하다. 물론 이 태도와 정동은 사태의 원인이 아니다. 사태의 근본에는 한없이 좁아진 병목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있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일만도 아니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은 ‘평등이 답이다’에서 “불평등은 분열을 낳으며 아주 작은 차이조차도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낳는 듯 보인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이유다. 중도진보 정당들이 고학력의 중산층 엘리트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분노한 노동계급이 속절없이 우익 포퓰리즘의 깃발 아래로 모여드는 것이 서구의 근래 정세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선 너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선을 넘어야 한다. 선 넘어 손잡지 않으면 중산층의 삶조차 쉽지 않다.
- 2부, 선을 지키는 사람들, 선 너머의 사람들 198p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원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순진한 낙관주의라고 비난받기 십상인 시대다. 하지만 “뜻이 없으면 많은 길이 불가능해진다.” 정치를 통해 우리의 삶을 개선하고,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조롱받는 세상이다. 냉소로는 세계의 고통을 없애지도, 줄이지도 못한다. 다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유다.
- 3부, 유토피아, 좋은 꿈을 꾸는 좋은 방법 217p
* 창비 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을 받았습니다.